“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저를 찾다가 못 찾아 가지고 눈도 못 감고 돌아가셨다 하더라고요. 내를 찾으려고 전국 사방을 다 돌아다녔나 보더라고요. 결국엔 끝내 못 찾으시고 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 이 사람들이 그래 서신을 제대로만, 한 번만 제대로만 넣어 줬어도 거 5년이라는 세월을 거서 안 있었을 긴데.
국가에 대해서는 보상도 안 바라요. 진실만 파헤쳐 달라. 국가에 의해서 자행 됐다는 것만 인정을 해 달라. 국가가 이렇게 이렇게 해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했다. 있는 그대로 , 사실만.
박인근이라도 (사죄를) 못 하면 아들내미, 아들내미 못 하면 저그 손자라도… …. 피해자분들 모아 놓고 ‘죄송합니다’ 무릎 꿇고 사죄 한 번만 받으면은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부산에 살고 있는 손정운(46) 씨. 그는 끝내 터져 나온 눈물을 훔쳤다.
손 씨는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세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손 씨는 아버지·새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손 씨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남달랐지만, 아버지가 없는 동안 가해지는 새어머니의 구박에 집을 나왔다.
“초등학교 3학년 다니다가 가출을 했어요.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간 시기가) 1981년도 여름이에요. 돈 한 푼 없이 진주역에 가 가지고 기차를 탔는데, 종착역이 부산역이었어요. 종착역에 딱 내린다고 내렸는데, 갈 데가 없잖아. 그때는 길바닥에 자는 사람도 많았었고, 역 안에서 자는 사람도 많았었고.
그래 앉아 있으니까 그때 당시에 중부경찰서에서 저를 잡아가더라고요. 그때 저 말고 제 또래 되는 애들 몇 명하고 어른 몇 명이 있었어요. ‘집이 어디냐’ 이런 것도 뭐 물어보지도 않고 시청 사회복지과로 연락해 가지고 보내더라고. 여기서 또 형제복지원으로 연락을 했는갑더라고.”
당시 손 씨는 집 주소를 알고 있었지만, 경찰서와 시청의 그 누구도 손 씨에 대한 인적 사항을 묻지 않았다. 그렇게 손 씨는 형제복지원 차에 태워졌다.
“지금도 진주집 주소를 외우고 있어요. 그런 거 전혀 안 물어보고 그냥 형제복지원으로 연락을 해 가지고. 그때는 ‘닭장차’라고, 일반 트럭에 포를 씌워 가지고 사람들 막 집어 태워 가지고 가는 거 있었어.
내하고 해 가지고 (끌려간 사람이) 열댓 명 됐을 거야. 처음 딱 들어가자마자 사무실에서 사진을 찍어요. 입소 카드를 만들어야 되니까, 팻말 들고 사진을 딱 찍어요. 찍고 나서 대충 신상 적고. 그때 집 주소하고 물어보더라고.”
손 씨는 영문도 모른 채 신입 소대로 옮겨졌다. 형제복지원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신입 소대로 옮겨진 사람들의 옷을 전부 벗겼다. 손 씨를 포함해 끌려 온 사람들은 삼십 분 동안 발가벗은 상태로 형제복지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뺨을 맞거나 야구방망이로 맞았다.
이어 형제복지원에서 주는 운동복(하늘색 비슷한 색이었다고 기억)을 입고나면, 무지막지한 폭력이 날아들었다. 손 씨는 끌려온 곳이 어딘지, 왜 끌려왔는지조차 모른 채 그저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맞아야 했다고 떠올렸다.
영문도 모른 채 겁에 질린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일어나는 시간은 오전 6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예배였다.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 같은 것을 외워야 했는데, 일주일 안에 외우지 못하면 ‘외울 때까지’ 맞아야 했다.
예배가 끝나면 간단한 세면과 함께 점호가 이뤄졌다. 중대장이라는 사람이 각 소대를 다니면서 인원을 파악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군대식 체제였다.
제식 훈련도 이뤄졌다. 밖에서 손님이 왔을 때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뙤약볕 아래서 서너 시간씩 훈련을 받았다.
“예배 보고 점호 하고나서 식당이 거 중간에 있거든요. 엄청 커요. 다 집합을 해요. 밥이라고 주는데 이거는 무슨 반찬이. 거 뭐 된장국이라고 끓여 주는데, 뭐 된장만 몇 숟가락 풀어가 소금 뭐 얹어 갖고 마 간해서 주는 거고. 배추 같은 이런 것도 저 공판장 같은 데 가 가지고 쓰레기 버린 것 있잖아요. 그런 거 주서 와 가지고 막 주서 넣고 해 가지고 완전 개죽처럼 주는 거예요. 배가 고프니까 그거라도 먹어야 살잖아. 내가 안 먹어버리면 다른 사람이 내걸 빼끄러 가버리니까. 억지로 먹어야 돼, 그거라도. 중대장이 사람들 밥 먹고 있는데 야구방망이 들고 다니면서, 밥풀 하나 흘리면 뒤에서 때려버려요.
거기는 한 번씩 보면은 시청에서도 그렇고 하여튼 밖에서 견학을 많이 와요. 견학 오는 날은 형제복지원 비상이 되는 거예요. 그날은 국도 반찬도 엄청 잘 나와요. 보여줘야 하니까. 옷도 파카(겨울 옷) 그런 거 하나씩 다 나눠주고, (손님들) 돌아가면 다 빼껴 가버리고 홑겹떼기 하나 입혀가 다니는 거예요.”
▲ 손 정운 씨는 부산시를 보면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 없다. 그는 자신을 형제복지원으로 끌고 간 경찰서와 시청이 있었던 자리를 기억하고 있다. |
“들어가서 한 달 정돈가 있다가 서신을 한 번 넣어 준다고 사무실로 저보고 내려오라 해 가지고 집 주소랑 이런 걸 물어보더라고요. 그래 내가 가르쳐 줬는데. 뭐 편지는 내가 쓰는 게 아니고 그 사람들이 ‘이런 사람이 여기 있으니까 데려가라’ 이런 식으로 연락을 해 준다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각자 집으로 보내 준다고 이야기 하는데, 제가 그걸 안 봤으니까 내가 그거는 모르고. 신입 소대에 있을 때는 기대를 했죠. 우리 아버지 같으면은 무조건 내를 데리러 올 긴데. 우리 아버지 같은 경우는 저를 엄청 진짜 (예뻐했어요). (그 뒤로도) 5년 동안 다른 소대에서 서무를 통해서 편지를 열다섯 번을 했어요. 안 오더라고.”
신입 소대에서 머무는 기간은 1주~2주. 손 씨는 폭력이 난무하는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 불안에 떨며 ‘집에서 데리러 올 것’이라는 한 가닥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 희망은 막연한 소원으로 남겨진 채, 손 씨는 아동 소대로 배치됐다.
어린이들이 있는 아동 소대에서도 폭력은 매일 가해졌다. 손 씨는 아동 소대에서 박인근 원장의 얼굴을 처음 봤는데, 그때 자신이 있는 곳이 ‘박인근 원장이 하는 말이 법’인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그 법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쥐 잡 듯’한 폭력을 ‘밥 먹 듯’ 당해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기다린 시간은 어느덧 2~3년을 지나, 손 씨는 9소대(청소년 소대로 기억)로 보내졌다. 손 씨는 9소대 소지반장(소대장-소지반장-소지)을 맡기도 했다. 형제복지원은 청소년들을 형제복지원 안의 건물을 짓는 데, 또는 바깥의 돈을 모으는 데 이용했다.
손 씨는 청소년과 20~30대 사람들 대다수가 형제복지원 새마음교회를 비롯해 다른 건물을 증축했다고 증언했다. 박인근 원장은 ‘임금 등을 통장에 넣어뒀다가 나갈 때 주겠다’고 이야기 했지만, 통장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쌀 포대 안에 흙을 넣어 가지고 등짐을 지우는 거야, 어린 애들한테. 그걸 지고 새마음교회까지 뛰어다니는 거예요. 하루에 스무 개면 스무 개, 서른 개면 서른 개, 이렇게 안 하면 밥을 안 줘요. 스무 개를 해라 캤는데 두세 개가 빠진다 그럼 엄청 맞고, 안 맞기 위해서 무조건 해야 되고. 밥시간 되면은 주먹밥 요런 거, 그런 거 하나씩 주는 거예요. 한겨울에 옷도 진짜, 옷이라곤 해봤자 거기서 주는 운동복 하나 입고.
1983 년도인가 1984년도인가 거의 완공이 다 됐어요. 완공이 되고 나니까 박인근이가 외주에서 일을 받아 가지고 낚시공장 같은 거, 나전칠기 같은 거, 하여튼 뭐 철공소 같은 거 이런 게 있었거든요. 애들을 거 다 배치를 시켜 가지고 밖으로 내보내는 거예요. 박인근이는 그거 가지고 돈을 갖다 챙기고.”
맞거나 일하다가 다쳐도 별다른 치료가 없어 온몸이 아픈 게 일상이었다. 형제복지원 안에 의무실이 있었지만, 전문 의학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아닌 원생 몇 명이 엉터리로 치료하는 수준이었다. 손 씨는 ‘쉽게 말해 머리 아파서 가도 빨간약 발라주는 게 다였다’고 표현했다.
누군가에게는 가장 아름다웠을 시기, 나에게는 지옥이었다
“거기서 하루하루 버티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거 청소년 애들 거기서 감수성 이런 게 없었어요. 어떻게 하면 안 맞을까, 어떻게 하면 한 끼 제대로 찾아 먹을까, 그런 거기 때문에. 청소년 사춘기? 그런 게 없었어요. 지금 ‘인권, 인권’ 이야기 하는데, 뭐 우리는 인권이라는 단어 자체도 몰랐고, 때리면 맞아야 되는갑다. 시키면 해야 된다. 제 청소년기 이런 거는 거기서 완전히 다 허송세월 돼 버렸고.
교육이라곤 소대 쭉 앉혀 갖고 소대장이라는 사람이 교육하고, 그게 다에요. 제 솔직히 초등학교 3학년밖에 학력이 없어요. 형제복지원에 있을 때만 해도 야간학교 이런 게 있었는데, 우리 청소년한테는 야간학교 다니라고 얘기도 없었거든요.”
손 씨가 노역 외 한 것이라곤 여름성경학교, 체육대회, 크리스마스트리 만들기, 합창부 활동이 다였다. 이 모든 활동도 ‘박인근을 위한 축제’에 불과했다.
“1년에 한 번씩 체육대회도 했거든요. 보상은 뭐 별 거 없어요. 공책 몇 개 주고 그게 다에요. 체육대회 같은 거 하면은 우리 9소대에서 일등을 거의 다 했어요. 청소년 애들이라 빠릿빠릿하기도 했고. 박인근이 한 번씩 구경해요, 좋다고 앉아 가지고. 우리는 솔직히 안 했으면 좋겠고. 그것도 다 일이거든요. 체육대회 한 번 할라고 하면 한두 달 전부터 연습해야 되고, 연습하다가 제대로 안 하면은 맞아야 되고. 마라톤을 하거든요. 스물일곱바뀌를 뛰어요. 그거는 마라톤이 아니고 사람 벌주는 거지.
크리스마스 츄리 대회, 소대장이 잠 안 자고 시키고 했으니까.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해야 되요. 일등 하면은 과자를 조금씩 주고 그랬거든요. 그거라도 얻어먹으려고.”
합창부는 밖에서 손님이 왔을 때 보여주기 위해 연습하는 게 주였다. 이른바 ‘악대부’, 다루는 악기는 멜로디언과 북. 손 씨 역시 합창부에서 박인근 원장의 딸을 봤다고 증언했다(김민석 씨 인터뷰 참고).
청소년들은 성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성폭력은 소대 안에 공개적으로 이뤄졌다.
“김○○이라는 애가 있었는데, 우리가 ‘주 관장(박인근 원장 친인척)’이라고 불렀던 사람이 있어요. 주 관장 마누라가 가를 엄청 이뻐했어요. 아가 예쁘장하이, 거 안에서 ‘주 관장 아들내미다’ 놀리고 그랬었거든요. 거기는 저녁 여섯 시 이후에는 철문을 싹 잠궈 버리거든요. 가는 밖에서 놀다 오고 그랬었어요. 9소대 그때 인원이 40인이 넘었었는데. 소대원끼리 불침번을 서요. 소대장도 소대에서 자는데, 불침번 서다가 보면은 소리가 들려요. 어차피 한 소대가 빵 다 뚫려 있으니까. 마 칸막이가 돼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김○○이라는 애가 우리 소대에서 그나마 좀 예쁘장했는데 소대장이 몇 번 건드렸어요. 주 관장이랑 마누라는 그런 사실을 모르죠. 그런 부분이기 때문에 일일이 이야기 하면은. 그러니까 상상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똥물을 뒤집어쓴 채 죽도록 맞다… 희망은 ‘아버지의 죽음’이 되어 돌아오다
“도망 가면은 마 그 소대는 난리가 나는 거예요. 그날 하루 밥 못 먹고 땡볕에 세워 놔버려. 너그가 감시를 안 했다 이거지. 하여튼 도망간 소대는 그날은 죽는 날이고. 개 패 듯이 패고 그러니까 솔직히 (도망 안 간 다른 사람들은) 억울한 거예요. 걔 때문에 괜히 맞았는데, 우리끼리 걔한테 막 손찌검을 하는 거예요. 분풀이를. 걔는 (중대장실에서 맞고 또 소대에서) 이중 삼중으로 죽는 거예요.
당시에 경찰이랑 공무원이랑 전부 다 한편이었는데, 부산 시내를 벗어나는 것 같으면 모르지만은 또 잡혀 들어오거든요. 내가 알기로는 맞다 죽은 사람도 있었어요. 어느 날 분명히 쟤가 도망갔다가 잡혀서 중대장실에 끌려갔거든요. 그 다음날 안 보여요. 소문이 소문의 꼬리를 물고, 귀가조치 됐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러는데 안 들어오면 죽었다 봐야 돼요. 시체 해부실에 팔려도 가고 그런 거예요. 그렇게 맞아 갖고 안 죽은 애는 그나마 나처럼 운이 좋은 애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1985년 어느 날, 손 씨는 불침번 일을 하다가 도망치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깊이 잠든 새벽, 손 씨는 변기통을 통해 탈출을 시도했다. 세면장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의 오물통은 밖에서 넣고 뺄 수 있도록 돼 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공간, 손 씨는 이불을 말아 넣은 뒤 들어갔다. 이윽고 안에서 문을 열고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지만, 지나가던 경비에게 들키고 말았다.
손 씨는 똥물을 뒤집어쓴 채로 중대장실에 끌려갔다.
“진짜 저 죽는 줄 알았어요. 지금도 내가 치가 떨리네… …. 박인근이 보다 중대장이 기가 더 쎘었어. 총장, 사무장 제껴 놓고 중대장이 원장 밑이라고 보면 되요. 주일학교 외주에서 오는 선생을 건드려 갖고 그 안에서 살림을 차렸다니까요. 박인근이가 그것도 묵인을 해줬으니까.
사람이 왜 첨에 멍이 들면 퍼런데, 진짜 엄청 맞으면 빨개져요. 거기서 한 번만 때려버리면 피가 튀어요, 피가. 세 대만 딱 맞으면은 웬만한 항우장사도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려.
중대장실에 끌려가서, 내 태어나 가지고 (그 전에) 형제복지원 안에서 맞은 건 맞은 것도 아니에요. 그때 맞다가 어깨가 부러졌어요. 그 당시에는 온몸이 다 아팠으니까 여기는(어깨) 아프다는 생각을 못했었어요.”
손 씨는 그 뒤로는 도망 갈 꿈도 꿀 수 없었다. 집에서 데리러 올 것이라는 희망은 이미 절망으로 변한지 오래됐고, 손 씨 역시 형제복지원 안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혹한 폭력으로 붓기가 가시기도 전, 뜻밖에 손 씨의 작은아버지가 형제복지원을 찾아왔다.
“1985년 여름(이었어). 걔네들이 들어왔을 때 입었던 옷을 보관 했다가 주는데 안 맞잖아요. 작은아버지가 옷을 사주는데 그때 반팔을 사 갖고 입었으니까.
(작은아버지가 왔을 때) 사람이 기분이 뭐라 해야 하노… …. 작은아버지하고 우리 아버지하고 엄청 닮았었어. 저도 처음에는 아버진 줄 알았어요. 보고 막 ‘아버지, 아버지’ 하고 울었다니까.
그때 저보고 ‘정민아, 정민아’, 정민이라고 불렀으니까. ‘정민아, 나는 아버지가 아니고 막내 작은아버지다’… ….
그 자리에서는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소리 안 하더라고요. 데리고 나와 가지고 사상터미널 가 가지고 밥 먹으면서 그 소리 하더라고요. 엄청 울었죠. 저 찾다가 전국에 시설이란 시설은 안 가본 데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결론은 여그만 안 들려본 거야. ‘집으로 편지 간 거 없었냐’고 그러니까, ‘없었다’ 그러더라고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막내라고 저를 엄청 끼고 돌았거든요. 그러니까 얼마나 서러웠겠어요. 사람이 너무 슬퍼버리니까 진짜… …. 이거는 말도 안 나오고, 멍해져버리는 거예요.”
손 씨의 새어머니는 떠나고 없었고, 손 씨는 경상남도 함양군에 있는 조부모님의 집으로 갔다. 손 씨의 할아버지·할머니는 그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욱신욱신’ 비집고 나오는 고통, 곁에는 그 무엇도 없었다
“(중대장한테 맞아 생긴) 붓기가 안 빠졌었어요. 한 달인가 지나 갖고 붓기가 가라앉고 하니까, 긴장이 인자 확 풀려버리니까, 어깨가 쑤시기 시작하더라고. ‘왜 이러지, 나와 가지고 머리 부딪히고 이런 거 없는데’, 나는 거 맞아서 그런 거 생각도 안 하고. 정형외과 가 가지고 보니까 어깨뼈가 세 조각이 나 가지고, 요만한 봉 하나 대 가지고 다시 열 맞춰가 수술을 한 거예요. (맞은) 당시에 바로 수술 했으면 봉 안 대고 됐을 긴데.”
손 씨는 오른쪽 어깨와 왼쪽 손목에는 수술자국이 있다. 모두 형제복지원에서 이뤄진 폭력에 의한 것. 어금니 네 개도 없다. 손 씨는 틀니를 맞춰놓은 상태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수술 뒤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없지만, 간혹 욱신거릴 때면 애써 잊으려고 했던 것들이 비집고 올라와 괴롭다고 했다.
“맺혀 있어요. 맺혀 있는데, 밖에 분노를 표출하면은 내 자신이 어떻게 될란지 모르기 때문에 꾹 참고 살았고. 이태까지 살면서 형제복지원 얘기 꺼내본 적도 없어요. 그렇게 누르고 살았어요, 제가요. 누르고 사니까 화병이 생길라 그럴 때도 있고, 표출을 해야 하는데 멀쩡한 사람한테 표출 하면은 나만 나쁜 사람 되는 거고. ‘그런 데(형제복지원) 있던 놈이 저 짓을 하니까 나쁜 놈 아니냐’ 그런 소리 들을까봐, 남들한테 피해 안 주면서 살았고. 솔직히 누가 내한테 지나가다가 시비 걸어도 그냥 내가 도망가 버려요.
내가 죄 지어서 들어간 것도 아닌데, 그때 사람들은 형제복지원이 나쁜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하잖아요.”
▲ 손 씨가 휴대전화에 저장돼 있는 가족사진을 찾아 보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사진이 없기에,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많은 추억을 남겨주기 위해 수시로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
손 씨는 몇 년 동안 악몽에 시달리며 밤을 지새웠다. 꿈만 꿨다하면 ‘형제복지원’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배울 권리조차 빼앗겼으니 안정된 직업도 갖지 못했다. 손 씨는 홀로 낯선 도시에서 세탁소, 가스 배달, 중국음식 배달 등으로 근근이 생활했다.
“엄청 서러웠죠. 형제복지원 나와서 제 또래 이래 교복 입고 다니는 애들, 이런 애들 보면은. 하… …. 진짜 부럽다 못해 진짜… …. 부러운 거는 진짜 이 마음 밑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보다 더 위에 있는 거는 저거 가서 한 대 쥐어박고 싶다… …. 질투가 나니까, 그게 그런 마음이 들더라니까요. 쟤네들은 어떻게 부모 잘 만나 가지고 그래 사는데. (형제복지원) 나와서라도 잘 살면 모르겠는데, 이렇게 고생을 하니까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어쩔 겁니까. 내 인생이니까. 그거는 너그 인생이고, 나는 내 인생이다. 그런 마음이 드니까 또 수그러들더라고요.”
손 씨는 길거리에 즐비한 간판을 교과서 삼아, 스스로 글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손 씨는 형제복지원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겼다. 하지만 그 누구도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가난도, 배움도, 오롯이 손 씨의 몫이었다.
가장 찾고 싶은 ‘나’는 아직도 형제복지원에 있다
사람은 누구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어린 시절 기억과 기록은 자신의 역사가 된다. 낡은 사진과 일기장, 너무나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이 손 씨에게는 애절함으로 남아있다.
“어렸을 때 사진 갖는 게 소원이에요. 제가 어릴 때 사진이 하나도 없어요. (형제복지원) 들어가기 전에도 계모 밑에 있으면서 사진을 못 찍었고. 들어가는 바람에 5년을 그렇게 보내버렸지, 나와 갖고 먹고 산다고 일하다 보니까 사진 못 찍었지.
제가 오죽 답답했으면 진주 (초등학교 3학년) 다니던 학교에 생활기록부에 사진이 있는가 싶어 가지고 보니까, 생활기록부는 있는데 사진이 없더라고.
그 때 (계셨던) 선생님들 아무도 안 계시는데. 그래 가니까, 30년 훨씬 넘은 기록부 찾아보자 하니까, 행정실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기록 찾는다고 한참 그거 했죠. 그거 찾는 것도 서너 명이 달라 들어서 찾는데 미안하더라고. 뭐라 해야 하나…….”
손 씨는 어린 시절 사진을 찾고 싶어 어렵게 초등학교 3학년 때 다니던 학교를 찾았다. 하지만 그가 찾은 것이라고는 ‘퇴학처리’ 뿐이었다.
“안 그러면은 (형제복지원) 들어갈 때 사진 찍은 게 있으니까… …. 입소카드 있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형제복지원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한테 물어보니까, ‘입소카드가 확보 됐어요’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 소리 들으니까 진짜 반갑더라고요. 하다못해 그 사진이라도 갖고 싶었으니까. 안 좋은 기억인데. 그거라도 찾고 싶어 가지고.”
진상규명과 사죄가 있기 전까지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우리 집사람도 그렇고 아들내미도 그렇고 딸내미한테도 내가 이 사실을 얘기를 안 했었어요. 못했어요. 나는 일을 하니까 내가 그걸(형제복지원 사건을 다룬 방송) 본 게 아니고, 집사람이 봤는데 내보고 ‘여보, 옛날에도 저런 데가 있었는갑다’ 이야기를 하더라고. 아, 마 속이 치밀어 오는 거예요 그냥. 그 당시에는 바로 얘기를 못하고 2~3일 있다가 ‘나도 이래 이래 돼서 거기 출신이다’ 그래 얘기 했드만, 우리집 집사람도 우는 거예요.
애들이 엄청 충격이었죠. 엄마하고 봤나보더라고 참상을. 아빠가 거 있었다고 하니까 안 믿더라고요. 얘기 하고나서 처음엔 안 믿길래 ‘그래, 믿기 싫으면 믿지 마라’ 했는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 단체 대화방이 생겼거든요. 내 알아보는 사람이 한 사람 두 사람 생기니까 믿더라고. 딸내미 같은 경우는 울지. ‘우리 아빠 불쌍하다’고. ‘불쌍할 것 없다, 아빠가 어렸을 때 고생한 거기 때문에 신경 안 써도 된다’… ….”
지금은 단란한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손 씨. 일찍이 지금의 부인을 만나 결혼해 아들·딸과 함께 살고 있다. 비록 경제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안정된 가정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했다.
손 씨는 ‘부산 쪽을 보고 오줌도 제대로 안 눴’을 정도였지만, 여러 이유로 부산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그는 아직도 부산시를 보면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 없다.
“한 번씩 가족들하고 장도 보고, 옛날 생각도 나고 그래서 지하도에 지나가는데. 지나가다가 보면 형제복지원에서 있었던 애들이 있어.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때가 있어요. 있는데, 보면… …. ‘왜 이렇게 사노’ 이러면서 한 대 쥐어박고도 싶고, 또 한편으로는 따뜻한 밥 한 끼 사주고 싶고 그러는데… ….
그런 데서 사는 데 젖어들었기 때문에, 나와서 적응을 못하는 거예요. 저 같이 가정 꾸리고 있는 애들은 솔직히 몇 명 안 되요, 진짜. 어떻게 보면 걔네들은 더 불쌍한 애들이고. 걔네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산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해서든지 보상해야 되거든요.
걔네(폭력을 직접 한 사람, 소대장) 같은 사람도 같은 원생이거든요. 내가 얘를 안 때리면 내가 맞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패야 하는 거야. 같은 원생이 같은 원생을 때리고 맞고. 어휴, 그게 악질인 거예요.
하다못해 ‘네 잘 못이 아니다, 너 때문에 잘못된 게 아니다’ 이런 게 있어야 됐는데, 이런 거 없이 뻥 터져가 나와 버렸잖아요. 그래 가지고 어떻게 되겠어요. 제대로 사는 놈이 얼마 없다니까요.”
애초에 생기지 말았어야 할 형제복지원. 손 씨는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내 또래밖에 남지 않았다’며 한숨을 뱉었다. 당시 40~50대부터 더 많은 나이의 사람들은 하소연도 하지 못한 채 억울하게 삶을 마감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특히 장애인 소대 같은 경우는 누군가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생존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바라봤다.
손 씨는 ‘형제복지원법’이 하루빨리 제정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책임 회피와,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빠른 시간 안에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라며 개탄했다.
“그 당시에 정부에서 합법적으로 해줘버렸기 때문에, 시청하고 경찰서하고 다 연결이 됐잖아요. 정부에서 만든 일이기 때문에, 박인근이 개인의 일이 아니고, 이거는 진짜 정부가 이거는 어떻게 해서든지 부각을 해 가지고 제대로 처리 좀 해주셔야 되고.
지금도 전국적으로 다녀보면은 형제복지원식으로 해 가지고 (운영하고 있는 곳이) 꽤 있을 거야. 우리 형제복지원 있을 때만 해도 밖에 사람들은 전혀 몰랐잖아 거 돌아가는 일을. 거 바로 옆에 동네 사람들도 형제복지원이 뭐 하는 데인지도 모르고.
돈을 떠나서 사죄를 받아야 한단 말이죠. 나 같은 경우는 최대한 잊어버리려고 진짜 노력했어요. 누가 내 인생 대신 살아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
솔직한 심정은, 죽기 전에 사죄 한 번 받고 죽었으면 진짜 여한이 없겠어요.”
출처 : 웰페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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